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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문덕의 재발견 (살수대첩, 조선후기 재평가, 역사적 기억)

by looojj 2026. 2. 20.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달라질까요? 을지문덕이라는 이름 앞에는 '살수대첩의 영웅'이라는 수식어가 자연스럽게 따라붙습니다. 하지만 역사 속 을지문덕은 전쟁 영웅으로만 기억되지 않았습니다. 어떤 시대는 그를 명장으로, 어떤 시대는 유학자로 평가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을지문덕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 그리고 그 변화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강가에 선 고구려 장군
살수 전장 위의 을지문덕

살수대첩 이후 을지문덕의 역사적 평가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에서 수나라 113만 대군을 격퇴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살수대첩 이후 을지문덕에 대한 기록이 갑자기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전쟁에서 직접 나가 싸운 것이 아니라 전략을 구사한 인물이었기에 전사할 이유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이처럼 을지문덕은 살수대첩의 주인공으로 역사 속 인물이 되었습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는 살수대첩을 기록한 후 사론을 통해 깊이 있는 평가를 내립니다. "양재의 요동전쟁에서 출동시킨 군사의 많음은 예전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었다. 고구려는 한 귀퉁이에 위치한 작은 나라로서 이를 능히 막아내서 스스로를 보전했을 뿐 아니라 그 군사를 거의 다 전멸했는데 이것은 을지문덕 한 사람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김부식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을 매우 중요하게 평가한 것입니다.

고려 시대에도 을지문덕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고려사 지리지에는 "청천강은 옛날에 살수라고 불렀는데 고구려 을지문덕이 수나라 100만 명을 격퇴한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살수대첩의 현장이었던 청천강을 언급할 때마다 을지문덕이 수나라 병사 100만 명을 격퇴한 곳이라는 설명이 반드시 따라왔습니다. 이처럼 을지문덕은 명장으로서 아주 뛰어난 장수로 기억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전혀 다른 평가가 나타납니다. 고려 말 정도전이 이승인의 문집 서문을 쓰면서 을지문덕을 문신, 즉 유학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동방이 대대로 중화의 문명을 흠모해서 문학에 종사하는 유자들이 줄을 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고구려에는 을지문덕, 신라에는 최치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본국 고려에 들어와서는 김부식과 이규보가 특히 뛰어났습니다." 을지문덕을 최치원, 김부식, 이규보 같은 문신들과 나란히 놓고 평가한 것입니다. 장군 을지문덕과는 거리가 있는 평가입니다.

시대 평가 관점 주요 내용
고려 전기 (김부식) 명장 수나라 군사를 전멸시킨 한 사람의 힘
고려 후기 (정도전) 문신·유학자 최치원, 김부식과 동급의 유자
조선 초기 (최부) 고구려 대표 인물 고구려의 유일한 기억되는 인물

이런 평가가 나온 이유는 을지문덕이 우중문에게 준 시 한 수 때문입니다. 그 시가 이후 계속 전승되면서 사람들은 이를 감상하고 평가했습니다. 시의 내용을 보면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해하였고, 기묘한 계획은 지리를 통달하였도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천문과 지리가 동시에 나오는데, 이는 주역에서 나오는 표현입니다. 주역 한 편에는 "위로는 천문을 살피고 아래로는 지리를 살핀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을지문덕이 천문과 지리에 대한 이야기를 주역에서 보고 시를 지었다는 것은 그가 독서를 한 인물, 즉 유학자였음을 보여줍니다.

이규보도 백군 소설의 첫머리에 을지문덕의 시를 인용하며 이렇게 평가합니다. "구절을 만드는 방법이 기하고 고고하며 화려하게 꾸미지도 않았다. 어찌 후세에 별 볼 일 없는 사람이 여기에 미치겠는가?" 보통 사람이 미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닌 뛰어난 작품이라고 평가한 것입니다. 이처럼 을지문덕은 살수에서 전공을 세운 후 뒷날에는 유학자, 문학을 아는 사람으로도 평가받게 됩니다.

조선 시대 최부가 중국에 표류했을 때 중국 사람들과 필담을 나누며 조선의 인물을 설명하는 장면도 흥미롭습니다. 소흥부에 도착했을 때 조선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역사와 산천, 인물, 풍습을 자세히 말하라는 요구를 받았습니다. 최부는 "우리나라의 인물은 신라의 김유신, 김양, 최치원, 설총, 백제 계획 그리고 고구려의 을지문덕, 고려의 최충, 강감찬, 조충, 김치료, 우탁, 정봉주 그리고 우리 조선은 일일이 셀 수도 없이 많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최부가 기억하는 고구려의 유일한 한 사람이 을지문덕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을지문덕은 조선 시대까지도 고구려를 대표하는 인물로 기억되었습니다.

조선 후기 을지문덕 재평가와 북벌론

을지문덕에 대한 평가가 드문드문 이어지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갑자기 을지문덕을 높이는 분위기가 만들어집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특히 병자호란 때 만주족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이후 조선 사회는 군사력 강화의 필요성을 절감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군사력을 강화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지도 못했고, 무엇보다도 청나라에서 조선의 군비 확장을 절대로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조선 사람들은 과거의 강했던 기억을 의도적으로 끌어올리려고 애를 썼습니다. 역사 속에서 소환된 인물은 바로 을지문덕이었습니다. 을지문덕이 우리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을지문덕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그를 추숭하는 분위기가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조선 효종 때 청나라를 치자는 북벌론이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과연 할 수 있겠는가"라고 의문을 품었습니다. 이때 북벌론 지지자들은 "할 수 있다. 우리 옛날에 을지문덕을 봐라. 수나라의 100만 군대와 싸워서 이긴 자랑스러운 전통이 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북벌론의 역사적 근거가 된 것입니다. 을지문덕이 이렇게 부각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을지문덕에게 제사를 올리는 사우가 건립됩니다. 사우는 교육 기능은 없고 제사 기능만 있는 시설로, 서원과 구별됩니다. 고구려 전통이 강했던 평안도 지역, 특히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과 살수대첩의 장소였다고 여겨지는 평안도 안주에 을지문덕을 제사하는 사우가 만들어졌습니다. 서원에 임금이 이름을 써서 액자로 내리면 사액서원이라고 하듯이, 사우에도 사액을 했습니다. 평양에 있는 을지문덕 사우에는 충무사, 안주에 있는 사우에는 청천사라는 사액을 내려주었습니다. 평안도 지방을 중심으로 을지문덕을 띄우는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 후기에 강한 군사력을 떠올리며 강조하는 분위기 속에서 해동 명장전이라는 책이 만들어집니다. 이는 정조 때 홍양호라는 사람이 쓴 책으로, 서문을 보면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국토를 지킨 훌륭한 장수들의 분전한 기록을 널리 전해 경종으로 삼고자 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김유신, 장보고, 을지문덕 같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었습니다.

역사적 기억의 형성과 을지문덕 석상의 미스터리

그러한 분위기 속에서 을지문덕 비석과 석상이 발견됩니다. 1910년에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석상과 비석이 발견되어 신문에 보도되었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1932년에 현진건이라는 소설가이자 언론인이 단군성적 순례라는 글을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을지문덕 석상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현진건은 빈처, 술 권하는 사회 같은 소설을 쓴 작가입니다. 그가 단군의 성스러운 행적을 돌아보는 기행문을 연재하면서 네 번째 글에 을지공 석상이라는 부제를 붙여 을지문덕의 석상에 대한 글을 신문에 발표했습니다.

석상과 비석은 지금도 남아 있으며 현재 북한에 있습니다. 인터넷에서 을지문덕 석상이나 을지문덕 비문을 검색하면 그 사진을 볼 수 있습니다. 제대로 된 비석은 아니고 깨져 있기도 하며 글자가 많이 훼손되어 안 보이기도 합니다. 보이는 글자를 판독해 보면 맨 앞에 "공은 기성인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기성은 기자의 고장 평양을 뜻합니다. 즉 을지문덕이 평양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을지문덕의 조상과 계보를 알 수 없다고 되어 있습니다. 조선 후기 사람들은 을지문덕이 평양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는 매우 흥미로운 의문입니다. 또한 살수의 수공 이야기는 삼국사기를 비롯해서 중국의 수서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신채호의 을지문덕에서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공설이 널리 알려진 것은 1931년경부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적 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의 복잡성을 마주하게 됩니다. 역사적 사실과 후대의 상상, 그리고 사회적 필요가 결합하여 하나의 인물상이 만들어집니다. 을지문덕은 전장에서만 영웅이 된 것이 아니라, 패배의 상처 속에서, 책 속의 한 줄 문장 속에서 다시 태어났습니다. 같은 인물을 두고 어떤 시대는 명장이라 부르고, 어떤 시대는 유학자라 평가했습니다. 결국 한 인물의 본질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는 사회의 필요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특히 조선 후기의 재평가는 현실의 군비 증강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과거의 영광을 호출하는 방법으로 선택되었습니다. 을지문덕은 수나라 100만 대군을 격퇴한 상징으로서 현실을 보상해주는 기억이었으며, 북벌론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근거로 활용되었습니다. 사우 건립과 사액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공식화된 을지문덕은 더 이상 개인이 아니라 집단적 자존심의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을지문덕이라는 이름은 역사 기록과 후대의 해석이 교차하는 경계 위에 서 있습니다. 역사는 기록이지만, 동시에 선택과 해석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영웅은 때로는 사실보다 우리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을지문덕의 재발견은 단순한 인물 재평가를 넘어, 기억이 형성되고 소비되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례입니다. 역사적 사실과 후대의 상상은 어디에서 갈라지는가라는 질문은 결국 역사 서술의 본질로 향합니다. 을지문덕을 통해 우리는 누가 역사를 만들고, 누가 기억되며, 그 기억은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을지문덕이 유학자로 평가받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 우중문에게 보낸 시에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해하였고, 기묘한 계획은 지리를 통달하였도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주역의 "위로는 천문을 살피고 아래로는 지리를 살핀다"는 표현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를 통해 을지문덕이 유학 경전을 읽고 학문적 소양을 갖춘 인물로 여겨졌으며, 정도전은 그를 최치원, 김부식, 이규보와 같은 문신들과 동급으로 평가했습니다.

Q. 조선 후기에 을지문덕이 재평가된 배경은 무엇인가요?
A.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특히 만주족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 조선은 군사력 강화가 필요했으나 청나라의 견제로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습니다. 이에 따라 과거의 영광스러운 기억을 소환하여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수나라 100만 대군을 격퇴한 을지문덕이 그 중심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북벌론의 역사적 근거로도 활용되었습니다.

Q. 을지문덕 석상과 비석의 내용에는 어떤 의문점이 있나요?
A. 1910년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발견된 을지문덕 비석에는 "공은 기성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을지문덕을 평양 사람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는 을지문덕의 조상과 계보를 알 수 없다고 되어 있어, 조선 후기 사람들이 어떻게 이를 알았는지 의문입니다. 또한 널리 알려진 살수의 수공설도 삼국사기나 수서에는 나오지 않아 역사적 사실과 후대의 상상이 어떻게 결합되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남습니다.


[출처]
영상 제목: [을지문덕 ep.03] 조선 사람들의 마음속 영웅 1위는 을지문덕이었다?!

채널명: 이익주는 역사

https://www.youtube.com/watch?v=6Ttg1zzn7dQ